* 12회 디페(18년 5월 5일)에 낼 예정인 히어로즈 플랜 비(히플비, HPB) 일렉얀일렉 책의 샘플연재 시작합니다
* 이 글은 시오님(@Bagak_H)과의 썰핑퐁 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일부 대사와 장면은 허락을 구한 후 차용되었습니다. 해당하는 파트 명시는 본책 및 최종인포에 표기될 예정입니다. 소중한 아이디어 사용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적당한 분량이 쌓일 때까지 비정기적 연재를 거칩니다. 또한 이 샘플은 탈고 전이기 때문에 문장이나 장면 등은 가필수정될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스타코어는 스며듦의 밤 같은 때가 아니더라도 1층은 열린 공간으로 자리했다. 자신을 도와준 스타코어 직원에게 직접 감사인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악용해서 침입하면 어쩔 거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보안을 담당하는 모 님께서 안내데스크에서 뻥을 치면 응대하는 사이에 검증해낼 수 있다며 자신만만한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실제로 이런 식의 트로이 목마 형 테러를 감행하는 인간들도 있었으며, 무사히 검거했다―이 시스템은 무사히 굴러가고 있었다.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상층 보안구역은 내츄럴의 비중도 많았다보니 원하지 않는 만남이라면 당사자가 거절할 수 있게 해준다는 의의도 있었다.
그러니까 접수처의 직원은 한 학생이 쭈삣쭈삣 와서는 2년 동안 그 누구도 찾지 않았던 이름을 댔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 저기 제가 사람을 좀 찾는데―혹시 캡틴, 이라고 불리는 분 계세요? 머리에 노란 브릿지 하고 있는 형이었는데.”
“아, 어느 분인지 알 것 같네요. 연락해 볼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인사과에 연락을 넣으면서 직원은 손끝을 얌전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만 데록데록 굴리는 학생을 흘끔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우리 국장님하고 같은 색이네? 이 애가 좀 더 밝은 색이긴 하지만.’
하긴 녹안은 드문 편도 아니었으니 홍채색이 비슷한 일 따위야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희네 국장님이 샛노랗게 탈색하할 일은 없었으니 누구 붙잡고 저 아이 눈동자가 국장님하고 비슷하지 않냐고 떠들 이유도 없었고.
*
간만에 히어로즈 앞으로 임무가 떨어지지 않은 날이었다. 심지어는 스페셜 에이전트에도 소속이 되어있는 바니나 델릭도 본사 대기만 내려진 상태여서 팀 히어로즈는 제각각 편한 데에 늘어져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놓지 않으면 언제 어떤 현장에 불려갈 지 모르는 지라 다들 잠 보충을 우선으로 둔 덕에 생활공간 전반에는 따숩게 데워진 보송보송한 햇볕과 노곤노곤하게 물렁이는 졸음이 들어차 넘실댔다.
그걸 덜컥 찢은 것은 기술부에서의 호출이었다. 호출음을 듣자니 임무 때문에 부른 건 아닌지라 호출 대상자인 일렉도 미적거렸다. 콜 화면에도 무서운 문구가 쓰여 있지는 않으니 별 건 아닐 터.
―안녕하세요, 캡틴.
“기술부장님, 갑자기 뭐에요. 우리 쉬는 날인데.”
―아니 1층 로비에 캡틴 찾는다는 사람이 와서, 잠시 볼래요?
“엥? 누가 절 보자고 해요? 나 집 나가고 연 다 끊어서 친척이고 뭐고 없다면서―는 깜짝이야.”
―이젠 이 기술에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음, 이 학생 두 달 전에 캡틴이 구해줬던 애네요. 성문도 일치하고.
자신의 신상잡기를 쭉 읽어본 기억을 떠올리며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하고 말을 꺼냈더니만 갑자기 허공에 새로운 홀로그램이 뜨더니만 1층 안내데스크를 비추었다. 기술부장 혼자서 아득한 초테크놀로지를 남발하는 건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 없는 거라고 거기에다 성문검사라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바니며 다른 에이전트들이 신물나게 경고를 해준 터라 일렉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두 달 전요? 어, 그러면―”
“캡틴, 만날 거예요? 그 애?”
“갑자기 말을 잘라먹고 그래, 로우. 할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하라고 애들이 그랬다면서.”
대신에 귀에 뛰어든 두 달 전이라는 키워드를 꺼냈더니만 이번에는 언제 곁에 왔는지 로우가 불쑥 말을 끊고 들어왔다. 기억을 잃은 후에 쌓았던 인상에 비하면 상당히 성마르고 조급해 보였던 터라 일렉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가 약간 얼룩졌다가 구석으로 데로록 굴러가는 걸 지켜보던 중에 어떤 가설에 도달한 그는 일단 질러보기로 결정했다.
“이거 나름 중요한 분기점이고 그런 건가?”
“! 아니요, 가 아니고 그게, 맞기는 한데요……. 내가 캡틴한테 선택지를 알려줄 수도 없는 거고, 그 나도 일단 나름대로의 규칙은 있고요.”
“말하고 말고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리고 선택은 내 몫인 건 변함없다며. 타임패트롤인가 그거 설명하면서 입이 닳도록 말해놓고 이제와서 뭐라는 건데.”
“아니, 그―너무 맞는 소리를 해버리니까 엄청 무안하네요.”
“그래? 그럼 이건 이야기 끝이지?”
“네에…….”
로우가 갑자기 뻐끔대면서 할 말을 못 찾는 걸 보아하니 전에 설명해준 타임패트롤과 선택지와 평행우주 장광설의 연장이지 싶었다. 그 때도 어차피 내 선택의 결과는 내가 지는 건 여전히 똑같지 않느냐고 일축했을 때도 딱 저 반응이었는데, 하여튼 저 놈도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저희네 팀원들이 하나같이 다 저런 구석이 있긴 했지만.
―캡틴, 접수처 직원이 슬슬 대답 좀 해달라는데요.
“어, 뭐. 만나볼게요. 얼굴에 못 만나면 절대 못 돌아간다고 써있구만.”
―네, 그럼 그렇게 전해둘게요. 7층에 동측 소회의실 있는데 거기로 가면 될 것 같고. 음 바니, 거기 있죠. 들리면 저 친구 좀 옮겨줄래요? 보안 문제가 있으니까.
“헐, 박사 너무해! 바니쨩은 오랜만에 푹 쉬는 중이었는데!!”
―하하, 알아요. 하지만 내부를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면서 이동시켜줄 수 있는 건 바니 뿐이잖아요.
“체엣, 정말로 이거 박사 부탁이라서 들어주는 거다?!”
로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나단이 대답을 재촉해왔고 일렉은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과거의 자신이 했던 일의 결과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긴 참이라 별 생각 없이 승낙했다. 그 후에 곧장 바니한테까지 일감이 떨어지는 바람에 선글라스 너머로 엄청난 눈총을 받긴 했지만.
*
바니가 그 친구를 마중 나갔으니 상층부에서 7층까지 내려가야 하는 제가 늦게 도착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니, 그걸 제외하고서도 자주 내려간 층도 아닌지라 10분은 족히 더 헤맸던 것 같았다. 결국 델릭이 무선으로 길 안내를 해줘서―바니는 쉬겠다고 안 내려갈 거랬어요―저 정도로 그쳤지 안 그랬으면 어린 친구를 독방에서 계속 기다리게 할 뻔 했다.
“미안, 많이 기다렸ㅈ――”
“그 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마자 노랗게 탈색한 정수리가 딱 눈에 들어왔다. 우렁찬 소리가 복도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서 지나가던 사원들마저 술렁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에요, 캡틴. 웬일로 이 층 와계시네. 누구 있어요? 한 마디씩 말을 거는 통에 일렉은 찾아온 사람이 있다고만 하고 화급하게 문을 닫았다.
“아, 놀래라. 너 성량 엄청나다?”
“헉, 그, 죄송해요. 좀, 지금 긴장도 했고―.”
“됐어. 보나마나 바니가 덥썩 잡아다가 옮겼겠고 기술부장님이 아무데서나 홀로그램 툭 띄워가면서 말 걸어왔겠지. 나도 가끔 놀라는데, 너라고 어련하겠냐. 그래서, 네 이름이―”
“앤드류에요. 앤드류 윌슨.”
바닥에 시선을 박고 있던 앤드류는 고개를 팍 쳐들며 긴장한 티가 역력하게 떠뜸떠뜸 이름을 밝혔다. 호의와 감사와 직접 만나 볼 수 있다는 기쁨 같은 게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당장에라도 손에 쥐일 것 같이 잔타이트를 닮은 황록색 눈동자 안에서 반짝였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이런 눈동자를 본 것만 같은.
“그, 아까 갑자기 튀어나온 누나가 그랬는데. 형 좀 크게 다쳤었다면서요. 이제는 괜찮아요?”
“바니, 아 정말. 걔는 평소엔 입이 무겁더니만―지금은 괜찮아. 넌? 음, 놀라기도 했을 거고 아마도 내가 기절해서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 못해서 말이지.”
정확히는 그 기억조차 날아갔지만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이었으니 일렉은 적당히 말을 골랐다. 앤드류는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 것 같이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아니, 야, 꼬맹아. 나 지금은 멀쩡하다니까? 야야, 울지 마. 나 사람 달래는 거 못 한다고.”
“저, 그때 형이―어허허헝, 형이 저 감싸고, 뭐가 막, 막 무너지고, 막 피가, 허어어엉.”
꼬맹이가 아예 목 놓아 울기 시작하는 통에 일렉은 어정쩡하게 손을 뻗어 등을 도닥여 주었다. 어쩐지 요 근래에 자꾸 말실수로 사람을 울리는 일이 잦은 것 같았다. 이런 식이면 차라리 묵언 수행 같은 걸 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극단적인 생각마저도 드는 찰나에 문득 좀 전의 기시감의 정체가 잡혔다.
‘국장님? 어째서?’
이안 데이비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그 사람과 지금 목 놓아 울고 있는 이 꼬마는 그야말로 아주 딴 판인데도 괜히 모습이 겹쳤다. 굳이 닮은 점이라면 눈동자뿐인데도.
‘아니, 근데 왜 탈색한 것도 어울릴 거 같냐. 딱히 불량한 티는 못 느꼈는데.’
갑자기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왔다. 입원해있던 초기에 곧잘 느꼈던 편두통이었지만 좀 전에 멀쩡하다고 두 차례나 말한 사람이 아픈 티를 내버리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서 일렉은 꼬맹이의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며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둘 다 멀쩡히 살았으니까 된 거 아냐? 난 그날 그 선택, 절대로 후회 안 해. 좀 다쳤으면 어떠냐. 그래서 너 구해낸 거잖아. 니가 여기서 그렇게 울면 난 뭐가 돼.”
“으흑, 그치만, 그치만.”
“그치만, 뭐? 야, 구해준 사람이 내 앞에서 울고 있으면 어떨 거 같은데. 웃고 있어도 모자라, 인마. 알았어? 이런 때는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게요. 하면서 인사하면 되는 거라구.”
계속 극적인 감정변화를 보여주던 앤드류는 제가 필사적으로 꺼낸 말에 눈물을 소맷단으로 슥 지워내고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이조차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아마도 묻혀있을 저의 기억 어딘가에.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미안해요, 앤드류 군.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어서. 캡틴한테 지령이 떨어져서 지금 데리고 가야겠어요. 캡틴, 지금 바니 보낼 거니까 대기해요.
“아니 갑자기 뭔. 이 직업은 휴일 보장도 안 해줍니까.”
―하하, 어쩌겠어요. 그게 일인 걸. 그래서 보수도 빵빵하잖아요? 아이쿠, 학생 앞에서 말이 많았네. 앤드류 군, 우리 스타코어에 대해 나쁘게 말하진 말아주세요. 알았죠?
“기술부장님, 지금 애 데리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알죠?”
―에이,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 저 여기 절대로 나쁘게 안 말할 거니까요!! 우리 가족들도 감사하다는 말도 전해달랬고, 또―”
“아니, 알았으니까. 너는 그냥 좋은 사람이 되면 그걸로 감사인사 받은 걸로 할게. 잘 가라.”
“네!!”
슬슬 못 견디겠다 싶을 즈음에 끼어 들어온 조나단의 통신에 미션이고 뭐고, 애 앞에서 체면을 차리고 있을 바에야 상황 다 아는 팀원들하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일렉은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니가 톡 튀어나와서는 별 말 없이 앤드류를 붙잡고 순간이동을 했고, 그제서야 어른으로서의 체면을 다 지켜낸 일렉이 회의실 책상 위로 머리를 박았다.
“일부러 맞죠?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아, 머리 겁나 아파.”
―오, 역시 캡틴. 바니가 바로 히데한테 옮겨줄 테니까 기다려요. 병가라도 써드릴까요?
“아냐, 됐어요. 그냥 약 받아서 먹고 자면 낫겠죠, 뭐.”
“박사, 그 친구는 데려다줬어. 그럼 우리 애기, 보건실 갈까여~”
“아나. 바니 방금 그건 무리수였다.”
“쳇, 재미없게. 그럼 바니 표 특급배송 갑니다★”
여느 때처럼 하이텐션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있는 바니에게 핀잔을 준 일렉은 일단 하이드에게 가면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며 눈을 감았다. 기절이라도 하면 링거를 이용해서라도 약을 줄 사람이기도 했고, 실력 있는 의사인 것은 틀림이 없으니 분명히 괜찮아 질 터였다.
*
누군가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슴푸레한 정신은 바닥을 가느다랗게 기어가는 그 희미한 울음의 끝을 붙잡았지만 시야가 그저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울음소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래오래 이어졌다.
일렉은 눈을 떴다. 흰 천장. 증축한 지 조금 지났다고 낡아지는 감이 있는 먼지얼룩 같은 걸 보아 제 방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그대로 기절해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두통은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지만 머리가 영 멍했다.
자는 내내도록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울어댔기 때문이겠지. 뒷맛이 영 씁쓸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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