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209_포스타입에 유료발행(현재 내림)
* 230125_투비컨티뉴드에 재발행(새 창)
* 1부 시즌1 초중반 시절, 콰드렛지 <내리다>에 투고한 작품을 오탈자 수정&후기 추가하여 재록한 책입니다.
비꽃
[명사]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기게 떨어지는 빗방울
- A5 중철 / 총 32p
- 4,000원
- 처용무영이지
※ 1부 시즌1 89화 시점에서 시작하므로 호와 이그나지오 사이의 구분 없이 '이그나지오'로 호칭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 가족은 아니었으나 가족이 되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아닌 이야기
- 사망소재 주의
- 해피엔딩 아님
내용샘플은 프롤로그 제외하고 본문 일부만!
"...그럼 결정났군."
"?!"
"넌 이제 돌아가라."
"뭐!? 지금 뭐하…."
다짜고짜로 보쌈질당한 것도 모자라서 영문도 모르는 채 싸웠다가 이제는 빠지라는 소리를 들은 무영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사태는 어느 하나 깔끔하게 끝난 것이 없이 꼬이기만 했다. 주위를 에워싼 산줄기부터 으슬하게 쏟아지는 음습함이며 물안개가 껴서 생긴 눅눅한 습기가 틈 없게 채우는 갑갑함 말고도 머릿속을 간질이는, 그저 윤곽뿐인 무언가가 목구멍을 틀어쥐고 있었다.
무영은 처용에게 따져 물으려다 말고 저와 똑 닮은 거울상―이그나지오를 쳐다보았다. 문득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시선을 돌렸던 무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음울한 날씨만큼이나 음울한 표정. 언젠가의 저와 닮은 표정이 잊은 꿈들과 겹쳐 흔들렸다. 모래 속에 섞인 사금처럼 제 모습을 되찾으려는 잔상은 무의식 아래에 깜깜하게 잠겼던 골격을 느릿느릿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이면―아,
"잠깐…."
드디어 꿈의 잔상이 현실과 맞닿았다. 그렇지만―
▼▼▼
정신을 차렸을 땐 유진의 집이었다. 반짝 눈을 뜬 무영은 제가 겪은 일은 까마득하게 모를 은율과 아라만 애꿎게 닦달했다가 이내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차차웅 관련된 일만 빼놓고 보면 나름대로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고 살았던지라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도 그랬다. 답을 얻어내지 못할 이들에게 맥락을 잡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가 끝내는 아까 거길 갈 수 있겠느냐고 쉐도우에게 물으며 허둥대던 무영은 막 집에 돌아온 진이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는 저 자신이 경악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 급한 문제는 따로 있으니까, 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연신 부산을 떨던 무영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진이 넌 어디갔다...아니, 지금 내가 할 일이…."
"어...저기, 형...특별한 손님이 오셨는데…."
"랑아!! 무사했구나, 랑아!!"
‘그 녀석’의 목소리. 직후에 매달려오는 성인 남성 하나의 무게감. 아까까지만 해도 제 반쪽의 안위가 걱정돼서 길 잃은 아이마냥 허둥대던 무영은 정작 이그나지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이게 뭐야, 난 삽질한 건가?’하며 패닉에 빠진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그나지오는 말갛게 웃으며 제 반쪽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소란과는 수십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처용은 제 손에 자라난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달라졌을망정 속알맹이는 귀퉁이하나 무너진 구석 없이 똑같아서 처용은 그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무영―랑이 솔직하지 못하게 날을 세우는 것도, 이그나지오―호가 그걸 모른 척 눙치며 웃어넘기는 것도 전부가. 조금 전, 신왕神王의 윤허가 떨어지기 전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던 아이들의 한결같음도 이제는 안심할 수 있는 깊은 뿌리였다. 모질게 맘먹느라 수십 수백 번을 잘라낸, 제 손으로 뜯어냈던 심장 깊숙이부터 꿀럭이며 토해지던 피가 드디어 그쳤다. 이걸로 다 되었다. 이제는 다 되었을 거였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처용은 빙글 몸을 돌렸다. 아무리 긴장을 풀었다한들 호의 직감은 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예리했으니 언제 이쪽을 볼지 몰랐으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제 아이들이 서로 무사히 만났다는 사실이었고 재회의 자리에 저까지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이제 계속 같이 있자, 랑아~"
"……."
이그나지오는 눈가를 한껏 접어 휘며 웃는 그 와중에 저 멀리서 흐릿한 잔상을 남기고 사라지는 검붉은 끝자락을 보았다. 저희에게 양극단의 감정을 새기고 내팽개친 '그'의 뒷모습. 이그나지오는 붉은 시선이 여전히 저희를 지켜보고 있는 마냥 랑을 더더욱 끌어안았다. 휘어갈려 빛나는 페리도트는 저처럼 사늘한 가을하늘을 흘끔 올려보았다. 움켜쥔 이 온기를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거였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에, 절대로.
▼▼▼
온갖 것이 뒤엉켰다가 풀렸지만 정작 천지가 뒤집히지는 않았다. 목숨을 걸었던 일이었음에도 지나고나니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정도의 톱밥 같은 감상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이제서야 오롯한 삼각의 관계를 만들어낸 셋은 부스러기뿐인 결말을 진작 바람결에 쓸어 보냈다는 듯 태연했다. 무영은 처용과 얽히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뻣뻣하게 굳었으면서 눈매만큼은 매섭게 깎아 떴고 이그나지오는 리온이 그토록 타박했던 "맘 약한 녀석"이라는 말에 맞게 헤실헤실 웃었다. 처용은 날선 분위기만 풀렸지 무영의 퉁, 하고 되돌아오는 반응을 즐기는 것은 여전했다. 가끔은 이그나지오가 처용의 장난 아닌 장난에 편승하기도 했다. 오가는 공기에 살기가 빠져나갔을 뿐, 셋의 관계는 크게 변한 것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마냥 컴컴하던 감정의 골이 눈석임처럼 안부터 큼직하게 무너져 메워진 것은 확실했다.
차갑게 굳은 대한大寒을 통과한 계절은 쏜살같이 입춘立春을 지나쳐 마침내 눈이 녹는다는 우수雨水에 닿았다. 사람들은 늘 그래왔듯이 그제서야 겨울이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듬해 봄이 다가와서야 겨울이 지났음을 알아차렸다.
서로 입 밖으로 말을 꺼내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셋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모였다. 무영은 매번 "내가 여길 왜 또 왔지"하며 꿍하니 투덜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살가운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무영이 "도대체 이 쓰잘데기 없는 짓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시답잖은 이야기가 반이었고 탁한 침묵이 고이는 게 나머지 반이었다. 처용이나 이그나지오 역시 가끔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고민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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