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B/일렉얀일렉] Myosotis (7)
* 12회 디페(18년 5월 5일)에 낼 예정인 히어로즈 플랜 비(히플비, HPB) 일렉얀일렉 책의 샘플연재 시작합니다
* 이 글은 시오님(@Bagak_H)과의 썰핑퐁 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일부 대사와 장면은 허락을 구한 후 차용되었습니다. 해당하는 파트 명시는 본책 및 최종인포에 표기될 예정입니다. 소중한 아이디어 사용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적당한 분량이 쌓일 때까지 비정기적 연재를 거칩니다. 또한 이 샘플은 탈고 전이기 때문에 문장이나 장면 등은 가필수정될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 헤드캐논이 두드러지는 편입니다.
* 샘플은 여기까지 업로드합니다! 이후 스토리는 본책으로 만나요~
눈을 감박일 때마다 어쩐지 눈꺼풀끼리 찐득찐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침대 헤드 근처를 더듬거려 안약을 찾은 이안은 뚜껑을 열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눈이 건조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울어서 부어버린 탓이었지.
이제서야 제대로 잠이 깼다. 이불의 감촉, 매트리스의 푹신한 정도가 집에 놓인 것들과는 달랐다. 애쉬가 레돌리아 시티로 돌아온 후엔 웬만해서는 집에서 자곤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간만에 국장실 옆에 붙어있는 휴게실에서 하룻밤을 꼬박 잤다. 아마 어젯밤 내내도록 저한테 붙어있었던 다른 친구들도 퇴근도 못하고 여기서 밤을 샜을 터였다.
‘나중에 밥이라도 쏴야지. ...아니면 리퀘스트를 받던가.’
몇 시간을 울었던 탓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목도 쩍쩍 갈라져서 아무래도 외부 일정이 있다면 모조리 다 취소해야할 판이었고. 오늘 치 보고를 받을 때에도 육성으로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버텨온 지 십 년 동안에 이렇게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어렸을 때야 눈물샘이 느슨해서 곧잘 섧게 울어댔다지만 그날 이후로는 그리 쉽게 울어서야 안 되는 위치였기도 했으니까.
일단 바닥에 엎어져서 꺽꺽 소리 내어 울고 있다 보니 애쉬가 들어와 있었다는 것은 기억했다. 고개를 드니 이걸 어쩌나 싶은, 익숙한 표정이 보였고 그대로 다시 긴장이 한층 더 풀려서 붙잡고서 엉엉 울었던―.
“야, 일어났냐.”
“아씨, 노크는 좀 해라, 애쉬놈아.”
“목소리 봐라, 아주. 조니가 너 오늘 병가처리 해 놨다. 니놈새끼가 집에 가서 쉴 놈은 아니고. 그거랑 물.”
방금까지 반추하던 기억 속에 있던 얼굴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얀은 완전히 뒤집힌 목소리로 욕을 씹어 삼켰다. 애쉬는 어젯밤보다는 좀 더 뚱한, 차라리 저에게는 익숙한 얼굴로 물병을 건넸다.
“어제 너 때문에 레비도 여기 남았어, 새끼야. 얼른 물이나 마시고 속 차려.”
“음, 괜찮아지겠지. 지금까지 해온 게 있잖아. 아니 근데, 왜 병결이야. 나 멀쩡해.”
“멀쩡한 사람 목소리가 퍽이나 그렇겠다. 어휴, 등신 같은 놈.”
앞머리를 팍 쓸어 올린 애쉬는 이내 팔짱을 끼고는 영 불퉁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았다. 지내온 세월이 길다보니 저 눈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속이 갑갑한데 자기가 건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미치겠다는 때에나 보이는 눈이라 딱히 말싸움으로 번질 것 같진 않았다. 어쨌든 목이 아픈 건 사실이라 막 냉장고에서 꺼낸 것 같은 물병을 까서 마셨다.
“그래서, 어제 밤의 그 말은, 정말로 변함없는 거냐.”
“이게 맞는 거잖아, 애쉬. 이제야 전부 제자리로 돌아온 거라고. 캡틴은 더 이상 나한테 얽매일 필요가 없어. 루프도 묶였으니까, 더는―나한테 관여할 필요가 없어.”
“하아. 진짜 멍청한 새끼.”
“하하하, 나도 알아.”
“근데 알지? 난 너 잘못되는 꼴은 못 보는 거. 우리 모두 마찬가지야. 암만 네가 스스로 선택했다, 이게 맞다 해도 너한테 문제 있겠다 싶으면 뭔 짓읗 해서라도 뜯어 말려. 넌 전적도 있으니까, 더 이상 그냥 두지는 않을 거라고.”
정말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는 애쉬가 제가 웃는 걸 빤히 보더니만 대뜸 삿대질을 했다. 저와 달리, 벼랑 끝에서 강해지는 사람답게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자기 뜻을 관철하는 흑요석이 저를 꿰뚫었다. 지난 몇 년 간 본의 아니게 저를 놓칠 뻔했었다는 걸 이유로 이제는 아주 대놓고 관여하겠다고 선언을 하다니. 이안은 부스스하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인복 하나는 끝내주지.
“내가 친구는 잘 뒀네.”
“알면 제발 좀 잘 해라.”
“이번 주말에 요리 리퀘스트 받아줄게. 애들한테도 물어봐.”
“헐. 진짜지? 뭘 주문해도 받아주는 거다, 그럼?”
“속고만 살았냐. 이제 목 아프니까 말 더 안할 거야.”
“그래. 제대로 쉬고 있어라. 이따가 히데 씨 올려 보낼 거니까 도망치면 가만 안 둬.”
더는 목을 쓰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애쉬는 다시 한 번 몸 좀 챙기라고 신신당부하고선 쉬라며 방을 떠났다.
고요한 방. 마음은 서서히 정리할 수 있을 거였다. 지금처럼, 느리지만 차분하게. 마침내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매끈하게 침잠하는 날은 결국에 올 것이다.
어제 저녁의 캡틴도 그렇게 말했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너는 웃고만 있어도 모자라다고. 내가 여기서 울고만 있으면 그는 뭐가 되겠나.
*
누군가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또 그 꿈이었다. 마냥 깜깜하던 눈앞도 꿈을 되풀이해서 꾸는 동안 어슴푸레하게나마 사물의 윤곽쯤은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웅크린 등. 말간 어둠을 입어서 원래의 색을 구별하기 어려워진 어스름한 금발, 한 치수 크게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트레이닝복 저지, 둥글게 말려 때때로 들썩이는 어깨.
그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더 이상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달래러 가야만 한다는 충동과 그에 반해 꼼짝도 않는 몸. 그 틈바귀에서,
일렉은 눈을 떴다.
“또 그 꿈…….”
그는 양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대체 그 꼬마는 누구기에 잊을 만하면 제 꿈에 나타나서 속을 뒤집고 마는지.
*
거진 십 년 치의 기억이 날아갔더라도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그렇게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언제나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었고 그저 그 대상이 여러 약자들을 지나 내츄럴로 옮겨갔을 뿐.
과거의 자신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들어왔던 지간에 이곳에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일단 당장 문제의 사고현장에서 구한 아이가 무사했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뭐, 지금 그 꼬맹이가 자꾸 찾아오는 게 괜히 저를 따를 때의 올리비아가 생각나서인가 뭔가 간질간질한 기분이긴 했지만.
“형!”
“또 왔냐.”
“헤헤헤…….”
“뭘 잘했다고 실실 웃어. ...됐다. 학교 끝나고 바로 온 것 같은데 숙제랑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지, 너?”
“공부 제대로 하고 있어요! 짠! 이번 쪽지시험 만점!”
그냥 좋은 어른이 되면 그걸로 충분한 감사인사가 된다고 돌려보내놨더니만 그럼 그걸 꼬박꼬박 보고하겠답시고 일이 주마다 불쑥 머리를 디밀어 왔다. 일단 자기 좋다고 쫒아오는 애한테 험하게 굴 생각도 없고 어쩐지 이 꼬맹이의 웃는 얼굴에는 못 당할 기분인지라 일렉은 번번이 앤드류의 방문에 오케이 싸인을 내곤 했다.
‘아니면 자꾸 꾸는 그 꿈에 나오는 꼬맹이하고 닮아서인가. 금발이지?’
제 앞에서 만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헤실거리고 있는 꼬마의 백금발 정수리를 한참 빤하게 바라보던 일렉은 잠시 시계를 한 번, 비어있는 연락망을 한 번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잘 하고 있나보네. 카페 내려가자. 만점 기념으로 쏜다.”
“야호!”
스타코어 앞 카페의 시즌 한정 메뉴인 콰트로 초코파르페를 먹으러 가는 목적이 더 크긴 했지만, 어쨌거나 저 좋다고 졸졸 쫒아다니는 애가 웃는 걸 볼 수 있다면야 이정도는 충분히 싸게 먹히는 셈이었다. 국장님이 처음에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에 이곳에 대해 설명했었던 것도 그거였고.
기억을 잃기 전부터 뺀질나게 드나들었던 탓인지 카페 주인부터 알바생까지 제가 고르는 메뉴는 대충 손에 잡히는 모양이었다. 따로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한정파르페 시킬 거 맞냐고 묻는 통에 얼떨떨하게 고개만 끄덕인 일렉은 앤드류도 자기가 마실 레몬밤 허브티를 시키는 걸 보고서 자리를 잡았다.
“근데 너 볼 때마다 허브차만 마시는 거 같다?”
“공부하는 수험생들한테 좋은 거래요.”
“그러냐. 어. 선배님들.”
일렉은 막 카페에 들어온 레비와 마리니를 발견하고선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정작 인사를 받은 두 사람의 얼굴은 떨떠름하다 못해 못 볼 걸 봤다는 듯 사정없이 일그러져 버렸지만. 처음에야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눈치를 봤었지만 두 사람이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한 이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이 카페의 문턱을 밟았을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주문 확인조차 받지 않고 음료 제조에 들어갔다. 고참 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와 오늘의 과일주스를 말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합석 괜찮냐.”
“네, 뭐.”
“헉, 이분들 스타코어 경찰이시죠? 맞죠??”
“어머, 그렇긴 한데. 우리 학생은 누구길래 캡틴하고 같이―아, 네가 그 애구나?”
“흐음……. 정말 닮긴 했네.”
스타코어의 설립자들 가운데에 하나이고 최고참인 스타코어 경찰인 레비와 마리니의 합석요청을 입사한 지 오 년도 안 된 제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앤드류는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인 모양인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급기야는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주섬주섬 꺼내다가 싸인까지 요청했다. 사내에서도 인기가 좋다고는 들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까지도 지명도가 높을 줄은.
별 다른 말없이 각자 이름을 휘갈겨다 써준 두 사람은 어쩐지 앤드류를 한참동안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뜬금없이 닮았다는 말을 꺼냈다. 말이 끝나고 저를 바라보기는 했어도 앤드류가 저를 닮았다는 뜻에서 쳐다본 것은 아닐 터였다. 누가 보더라도 피 한 방울 섞여있지 않은, 남남이니까.
“닮았다니, 누구 말씀이신지.”
“네가 눈이 있다면 알겠지.”
“레비! 아이고, 미안. 요즘 썩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니거든. 우리가.”
“기분만 안 좋겠어? 맘 같아서는―”
“그 때는 진정하겠다는 애가 왜 갑자기 이래. 보통 네가 애쉬를 말렸는데 이번에는 왜 둘이 똑같이 굴어. 아, 우리 거 나왔네. 그럼 갈게~.”
“야, 마리니. 야! 이 기집애야, 밀지 마!”
저의 물음에 레비의 눈동자가 모나게 쏘아오는 바람에 일렉은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이 테이블을 엎고 주먹을 날릴 것 같은 기세에 앤드류도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를 민감하게 읽어낸 마리니가 힘껏 웃어 보이며 막 나온 음료와 함께 오랜 친구를 옆구리에 끼고 잽싸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기분에 침묵 속에서 시켰던 음료들을 받아온 일렉은 저보다 훨씬 얼어버린 꼬맹이의 이마를 툭 밀었다.
“왜 그렇게 굳어있어. 차 식는다.”
“그치만, 좀, 많이 무서웠는데요. 경찰관님들.”
“뭐, 사람이 살다보면 머리끝까지 피가 오르는 일이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 맨날 이상한 놈들이랑 대치하잖아. 스타코어 경찰이라면. 뭐 그런 사람 중 하나랑 닮았나보지. 나 얼굴만 보면 성격 더러워 보인다는 소리 많이 들어.”
“뭐에요, 그게. 셀프디스?”
“이게.”
앤드류의 머리칼을 막 헤집으면서 일렉은 어쩐지 제가 생각한, 뻣뻣하고 상한 질감 대신 부드럽게 감기는 직모가 낯설어서 금방 손을 떼었다. 머리가 슬쩍 욱신거렸다가, 잦아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병실에서 깨어났던 그 날보다도 오히려 지금이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는 것 마냥 갑갑했다. 어쩌면 요 근래에 며칠에 한 번 꼴로 꾸기 시작한 그 찜찜한 꿈 때문일지도 몰랐다.
*
마리니는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른 손으론 레비의 팔을 쥔 채 빠른 걸음으로 스타코어 로비를 지나쳤다. 레비는 카페에 들렀던 그 순간부터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듣는 귀가 많은 탓에 참고 있다는 듯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결국 저희가 아지트마냥 모이는 기술부서 휴게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레비가 기어이 의자를 팍 걷어차며 성질을 냈다.
“와, 저 꼬맹이 완전 어릴 적 얀 새끼랑 꼭 닮은 거 봐. 일렉 저 놈 멍청이 아냐?”
“정말 용케도 면전에서 안 뱉었네.”
“당연하지. 그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거든. 아, 생각할수록 화나. 얀이랑 저놈 둘이서 해결해야하는 게 맞는데 눈앞에서 보니까 완전 빡치네.”
우당탕 프레임이 휘어져 굴러다니는 의자를 한쪽 구석으로 대충 치운 마리니는 바로 그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까르륵 웃었다. 레비가 이런 식으로 화내는 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다들 막무가내로 나갈 때에도 애쉬보다도, 때로는 조나단보다도 더 침착한 건 그녀였으니까. 어쨌거나 저도 속이 폭폭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그건 동감. 그런데 어쩌겠어. 애쉬가 그랬잖아. 얀은 굳이 캡틴의 기억을 일깨우지 않는 쪽을 택했다고.”
“하. 그래도 건수만 잡혀봐. 우리한테 그런 중요한 걸 십 년도 넘게 숨겨놓고 이번에도 얌전히 덮어놓고 지나갈 수 있나 어디 한 번 보자고.”
애쉬가 레돌리아 시티로 돌아오면서 저희들에게 다 까발려 버렸던 노라 쌤이 타임패트롤이라는 사실이나, 연구소 당일 폭파 건의 진실 같은 것만 놓고 보더라도 이안 그 친구는 제 살 깎아서 돌려막기를 택하는 게 습관이 된 모양이지 싶었다. 애쉬 컴백 파티를 열기 전에 흠씬 두들겨주면서 우리가 다시는 이런 일을 묵인할 일 없다 못을 박아뒀음에도 또 이 지랄이라니.
“십 년이면 습관이 박혔을 만도 해.”
“걘 옛날부터 그랬어. 생겨먹은 거랑 딴 판이었다고.”
“하긴. 험악하게 생겨서는 요리도 잘 하고 집안일도 되게 깔끔 떨면서 하는 스타일이었고 말이지.”
“우리들 중에서는 얀 새끼만 과거 털고 일어나면 돼. 이왕이면 올 해에 끝을 보면 좋겠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마리니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희들이 늘 바라왔고 언제나 말해왔지만 이안은 깊은 못처럼 모든 걱정과 말을 삼켜왔었다.
속을 보이지 않는 검은 수면에 파문이 일어난 것은 십여 년 만이었다. 스타체이서와 맞서면서 속으로 꾸역꾸역 삼키는 일이 많았던 이안이 이토록 제 감정을 드러내고 힘겨워하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은 그 때야 깨달았다.
이안을 바꾸고 미래로 끌어갈 사람은 저희가 아니었다.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의 것. 분하다기보단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타나줘서 고맙다는 입장이었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풀리기는 할런지.
뭐, 정 안 되면 가장 가까운 친구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돌파할 의향이 있었다. 저희들이 쌓아올린 삶이 그런 것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