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B/일렉얀일렉] Myosotis (1)
* 12회 디페(18년 5월 5일)에 낼 예정인 히어로즈 플랜 비(히플비, HPB) 일렉얀일렉 책의 샘플연재 시작합니다
* 이 글은 시오님(@Bagak_H)과의 썰핑퐁 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일부 대사와 장면은 허락을 구한 후 차용되었습니다. 해당하는 파트 명시는 본책 및 최종인포에 표기될 예정입니다. 소중한 아이디어 사용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이번 샘플에는 시오님이 썰핑퐁 중에 말씀하신 <히어로즈로서의 경험이나 관계 같은 건 다시 쌓을 수 있지만 ‘그날의 당신’은 영영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얀>의 아이디어와 문장이 변형 차용 후 삽입되어있습니다.
* 적당한 분량이 쌓일 때까지 비정기적 연재를 거칩니다. 또한 이 샘플은 탈고 전이기 때문에 문장이나 장면 등은 가필수정될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스타코어 내에 있는 수술실은 곧잘 빨간 등에 불이 켜져 있곤 했다. 이곳의 의료팀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본인들도 곧잘 신세를 져봤음에도 팀 히어로즈는 연신 입술을 깨물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간신히 피가 멈췄던 상처를 재차 후벼 파인 듯이 창백한 면면들이었다.
한참 후에야 로우가 쭈삣쭈삣 손을 들었다. 평소에 뺀들거리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게, 꾸지람을 들을 짓을 한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어쩐지 무슨 말을 꺼낼 지 짐작이 갔다.
“그, 이걸, 봤었어요. 봤는데―말을, 하고는 싶었는데……. 미안해요. 말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아뇨, 그건 아니겠죠. 예전에 랜서 교수를 끝장낸 후에 나한테 찾아와서 했던 말, 기억 하죠? 거기다가 캡틴이 그 말을 들었다고 해서 구출을 포기할 리도 없고.”
이곳에 온전하게 머무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상당히 유해진 타임 패트롤의 말을 여지껏 수술실 입구를 노려만 보고 있던―아마도 능력을 사용하면 볼 수 있겠지만―델릭이 잘라냈다. 하기사 못해도 이삼 년은 보고 산 저희네 캡틴은 그딴 말 따위는 깔끔하게 씹어 드시고 하고픈 대로 행동했을 위인이니 그의 마지막 말에 나름대로들 굳어있던 어깨가 풀렸다.
“음, 그리고 바니. 이제 와서 말하는 거라 좀 그렇긴 한데.”
“? 갑자기 뭐? 헉, 설마 선물로 들어온 R사의 생초콜렛 가져간 걸 알아차렸니!”
“그런 것도 있었어요? 아아니, 그게 아니라―그, 옛날에요. 스타코어 초창기 때. 음, 제가 너무 막 나갔을 때, 바니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거 미안했다고…….”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 델릭의 폭탄발언에 바니는 들고만 있던 선글라스를 톡 떨어뜨리고 말았다. 휘둥그렇게 뜨인 금안이 잠시간 자기가 들은 게 뭔지 제대로 파악이 끝나자마자 곁에 있던 안티를 붙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세, 세, 세상에 우리 델릭이 달라졌어!”
“아아악!! 바니, 어지러!! 좀, 으악! 델리이익!! 받아랏!!”
“아니, 안티. 그렇다고 저한테 바니를―――.”
“델릭!! 너, 너말야! 그래 좀 알면 앞으론 절대 절대 그러지 말라고! 눈앞에서 아무 것도 못하는 그 기분, 너도 좀 알아야해!! 어허허헝―. 내가 그 때 얼마나, 얼마나아아아!!”
“바니, 어지러워요――.”
바니의 손에 잡혀 짤짤 흔들리던 안티가 업어치기를 응용해 그녀를 델릭에게로 넘겨버렸고 바니는 이때다 싶었는지 아예 델릭의 멱살을 그러쥐고 마구잡이로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간신히 같은 경험으로 그녀의 좌절감을 느낀 탓에 델릭은 안티처럼 그녀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그저 속절없이 무서운 속도로 흔들리는 시야를 내버려둘 뿐이었다.
당장에라도 게울 것 같은 울렁임에 델릭이 상대가 바니이긴 하지만 마취총이라도 꺼내야할까 고민하는 그 타이밍을 딱 재고 나타나기라도 한 듯, 이안이 수술실 쪽으로 걸어왔다. 국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니는 정말 에너자이저가 따로 없다며 로우와 속닥대고 있던 안티가 스프링처럼 톡 튀어나가서 거의 비명처럼 물었다.
“국장! 우리 캡틴은? 문제없대? 거, 당신은 저거 보고 같은 거 실시간으로 받지 않아? 내 동생을―이 몸을 살렸던 것처럼 할 수 있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형식이라도 캡틴은 살릴 걸세. 반드시 그러리라 약속하지.”
질문은 안티 혼자서 던졌지만 제각각 다양한 색의 눈동자 쌍쌍이 같은 질감으로 이안을 향했다. 짙은 올리브 색 눈동자는 잠시 눈꺼풀 아래에 가려졌다가 그 무엇보다도 확고한 의지와 함께 뜨였다. 선언이었다. 그를 저승사자의 손에 넘기지 않으리라는.
예전부터 뭐든지, 기어이 이뤄내고 말았던 굴지의 사내였다. 이안의 말이 발휘하는 힘은 능력의 깊이만큼이나 강했으니까. 얼핏 안도의 숨이 흘렀다. 수술은 아직 한창. 그래도 처음 이 자리에 모였을 때만큼 혼란에 겹지는 않았다.
“자네들은 회복실에서 그를 맞이할 준비나 해주게. 그 전에 제대로 쉬어두고. 임무를 다녀온 건 자네들도 마찬가지니까.”
그 분위기를 읽은 이안은 눈가를 둥글게 말아 웃었다. 그 누구도 잃을 수는 없었다.
*
일렉트리컬 캡틴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팀 총 책임자인 하이드 할은 이안 데이비스를 따로 호출했다.
*
하이드가 남을 찾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고, 그 희귀한 사례는 보통 사태의 심각성을 반증하곤 해서 이안은 그의 연락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감각에 심호흡을 했다. 조나단을 통해 올라온 보고에는 수술은 성공적이라고 했었으니 생명에 지장이 있거나 어딘가 몸을 못 쓰게 된 건 아닐 터.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정신 쪽의 문제겠지.’
그 짐작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하이드의 개인실 문을 열었을땐 이미 조나단과 마리니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논하던 중이었으니까.
저를 발견한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흐려지는 것을 보며 이안은 입가를 끌어당겼다. 애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벌써 등짝을 한 대 얻어맞고 남았을―오랜 친구의 말을 빌리면―그 빌어먹을 웃음을 지어보이자, 조나단이 이마를 턱 짚더니 마리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자기가 전달했다가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쿠션이 없을 거라는 몸짓이라서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마리니는 잠깐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우선 얀, 너는 설명을 듣는 동안은 아무 것도 생각 말고, 그냥 듣기만 해.”
“그게 말이 돼?”
“최소한 내 앞에서는 말이 되지. 그리고 이건 우리 모두 협의한 사항이야.”
“아…….”
그럼 내가 토 달 건 없지 않나, 하며 이안은 벽에 기대진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앉았다. 제가 그만큼 충격 받을 일이라는 뉘앙스는 이미 충분히 들었으니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는 데에는 이게 최고였다. 뭐, 애초에 생사를 함께 넘나들었고 이제 십 년도 넘어간 친구들 앞에서는―심지어 하나는 내로라하는 정신계 내츄럴이다―소용이 없을 일이지만.
마리니는 제가 의자에 앉는 걸 기다린 후에 입을 열었다.
“마음은 단단히 먹은 것 같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캡틴이 기억상실이야. 맞은 부위가 좋지 않았어.”
“의사로서의 소견은 캡틴에게 영구적 장애가 남을 후유증은 없으니 그 점은 안심하렴.”
기억상실. 그 단어에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나름 위로라는 건지 진정하라는 건지 하이드가 그 외는 무사하다는 데에 강조를 하며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눌러 말했다. 어쨌든 한 박자 늦은 이해는 곧 일말의 의문으로 번졌다. 기억은 곧 정신과도 연관이 된다. 그리고 그 분야에 있어서 최고인 아모레 마리니가 있다. 이 조합이라면 충분히 해결가능한 문제가 아닌가.
그런 의문을 넌지시 시선에 담아 보내자마자 조나단과 마리니가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얀. 네가 무슨 생각하는 진 잘 알겠는데, 네가 생각할 수 있는 걸 내가 못 할까봐? 마리니한테 스캔 먼저 시켰었어. 정말 혹시나 싶어서 내츄럴의 능력개입인지는 내가 확인했고.”
“그래서, 결론은?”
말을 꺼내면 아예 직구로 푹 찔러 들어오던가 학회처럼 장황설이 되던가 하는 조나단의 이번 스위치는 후자였던 모양이라 이안은 급하게 말을 끊어먹으며 성마르게 물었고 대답은 마리니가 이어받았다.
“소실 방식을 몰라서 규명을 못 하고 있어. 쉽게 설명하면 사람을 찾으려면 정말 일반적인 거라도 특징이 필요한데 이건 아예 누굴 찾아야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라고 해아하나. 그러다보니 내가 잘못 들쑤시면 지금 남아있는 기억까지도 같이 날아갈 수도 있어.”
“다르게 말하면 데이터의 존재는 아는데 저장되어있는 위치에 갈 수 없는 거지.”
추상적인 내츄럴의 능력이란 역시 설명을 들어도 쉽게 감이 오질 않았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결론은 저희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안은 어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푹 꺾었다가, 다시금 시선을 올렸다.
그 순간에야 조나단과 마리니는 예상했던 사태를 마주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자리에는 스타코어 국장인 이안 데이비스가 아닌, 저희가 아주 잘 아는 물러터진 그 이안 데이비스가 있었다. 저 절박한 표정을 보았던 것이 몇 년 전의 일인지. 저희에게조차 최소한의 방어기제를 남기던 친구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맨 얼굴이 섧으면서도 또 익숙해서 두 사람은 대체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최악의 소식은 어떻게 전해야하는지 막막해졌다.
“그래서, 캡틴은 어디까지 기억하는 건데?”
질문에는 답이 있기 마련이었고, 이안은 마리니에게서 나온 대답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주 오랜만의, 치명적인 상실이었다.